Page 34 - 정형외과 소식지 384호-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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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포학하고 잔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여후였지만 사마천은 그녀의 치세를 후하게 평가하였다. ‘혜제와 고후 때 백성들은
전국시기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군신들은 모두 하는 일 없이 쉬고자 하였다. 혜제는 팔짱만 끼고 있었고 고후가
女主(여주)로서 황제를 대신하여 정치가 방안을 벗어나지 않았지만 천하는 태평하고 무사하였다. 형벌을 쓰는 일이 드물었고
죄인도 드물었다. 백성들은 농사에 힘을 쏟았고 입고 먹는 것이 나날이 풍족해졌다.’
고후 여치의 사후 고제 유방의 옛 신하인 주발과 진평등이 여씨 일족을 주살하고 유방의 아들인 代王(대왕) 劉恒(유항)을
세워 황제로 옹립하니 文帝(문제)다. 문제와 문제의 뒤를 이은 景帝(경제)의 시대를 한나라의 전성기인 문경치세라고 부른다.
초한쟁패에서 이긴 유방이 한나라를 세웠다. 그의 사후 나약한 혜제가 섰으나 여후가 모든 정사를 주관하였고 자신의 일족인
여씨들을 중용하여 자칫 나라가 유씨에서 여씨로 바뀔 위험이 있었으나 공신들의 힘으로 나라가 바로 서게 되었다. 특히
34 혜제의 시기에 소하와 그를 이은 조참과 같은 유능한 신하들이 제도를 수시로 변경하지 않고 전임자의 정책을 계승하여
나라를 다스려 그 후 한나라가 안정적으로 유지 될 수 있었다.
정
형 ‘고려의 정책이나 법령이 사흘이면 바뀐다’는 뜻인 高麗公事三日(고려공사삼일)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웃던
외 말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뀐 뒤에도 이름만 朝鮮公事三日(조선공사삼일)로 바뀌어 일관성 없이 수시로 정책을
과 바꾸는 우리 자신을 비하하는 말로 계속 사용되었다.
학
회 柳夢寅(유몽인)의 於于野談(어우야담)에 조선공사삼일이 나온다. 壬辰倭亂(임진왜란)을 수습한 명상 柳成龍(유성룡)이 전쟁
소 중에 최고위 군직인 都體察使(도체찰사)를 맡을 때 일이다. 각 고을에 발송할 공문이 있어 역리에게 주어 각 고을에 보내게
식
했다. 사흘 후에 고칠 일이 생겨 회수시켰더니 아직 발송하지 않고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왜 아직 공문을 보내지 않았느냐고
꾸짖자 역리가 조선공사사흘이란 말이 있어 고칠 것을 예견했다고 태연히 말했다. 유성룡은 자신의 잘못이라며 고쳐서 반포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새로운 정권이 시작하게 되었다. 새로이 일을 맡은 자는 의욕에 불타 개혁이라는 이름 아래 옛것을
폐기하고 새로운 일을 벌이려는 경향이 있고 그로 인해 자칫 큰 혼란을 초래하기도 한다. 천하대란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조참이 이전의 기틀을 그대로 이어받아 보전하며 일을 크게 벌이지 않는 자세는 한나라가 안정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물론 蕭規曹隨(소규조수)는 전임의 통치가 올바른 것이었을 때 해당하는 것으로 잘못된 정책에 대하여는
고쳐나가는 것이 옳을 것이고 그것을 판단하는 것이 지혜라고 하겠다.
전 정권의 정책도 모두 적폐의 대상이라고 바꾸어 백성들을 혼란스럽게 하지 말고 유연하게 차츰 개선하여 국민들이 그
변화를 못 느끼게 하는 것이 좋은 정치의 묘라 하겠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완벽할 수는 없고 그런 불완전한 방침으로의
변화보다는 조금 불완전하여도 오랜 관습을 국민들은 더 편한 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국민들이 제일 적응하기
어려운 것은 아침에 변하고 저녁에 고치는 정책 즉 朝變夕改(조변석개)다. 아침에 내린 명령이나 법령을 저녁에 다시
고치듯, 계획이나 결정 따위를 일관성이 없이 자주 뜯어고치지 말고 소하가 정한 법규를 조참이 이어가듯 백성들의 평안을
먼저 생각하여야 한다.

